1. 진실이기를 원함#
앞을 보고 걷느라 아래를 미처 보지 못해 한 칸 아래의 계단을 밟은 적이 있다. 평지로부터 쑥 꺼지는 느낌은, 땅이 아래에 있다는 진실과 땅이 그대로 이어질 거라는 예상의 괴리에 다름 아니겠으니. 바로 그 예상은 깨어지고 나서나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라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폭로한다. 어쩌면 일종의 타성일 수도 있으리라. 우리는 익숙한 것들을 예상한다. 어쩌면 내일 해가 뜨지 않으므로 해서 얼마나 일출을 당연하게 여겼는지 깨달을 수도 있으리라.
요는, ‘진실’과 ‘진실임직함’의 관계가 아니던가. 무언가 인식할 적에 우리는 다량의 사례로부터 원리를 귀납하지만, 그런 일차적인 귀납에 ‘연역’을 더해야 계속해서 다음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연역’에서 우리는 가설을 설정한다. 이 가설은 반증으로 깨어지며, 만일 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증명을 이어 나간다면 언젠가 그것은 ‘이론’의 영역을 넘어 ‘법칙’이 될 수도 있으리라. ‘진실임직함’에서 ‘진실’을 기어이 찾아 나서는 행위는 우리 일상이라는 현실이자 진실을 구성한다.
첫 등교 날 학교로 가는 길은 학교라는 도달점에 도달할 수 없는 길들 사이에 있다. 어쩌면 먼 길을 돌아서 갈 수도 있겠으나, 어쨌거나 목적지를 두고 길을 찾을 때조차 우리 인식은 ‘진실’과 ‘진실임직함’ 사이에서 ‘진실’을 구분해 내고자 한다.
예상에서 빗나간 현실 위에서 우리는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우리 정신의 관성도 마주하지만, 기실 ‘진실’을 <추론>하고자 노력했다는 정신의 일관성 또한 마주했을 터다. 그리고 그 ‘추론’은 (다른 게 아니라) ‘틀릴’ 수 있고, 바로 그렇게 틀리는 지점에서 새로운 ‘추론’이 또한 샘솟는다. 자, 바로 이 ‘진실임직함’은 무엇 때문에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했는가 하고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저기 저 ‘진실임직함’이 ‘추론’의 영역에 있을 땐 분명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이 ‘상상’의 영역으로 가면 다른 일이 벌어진다. 추론은 도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 ‘상상’은 화자가 도무지 원하지 않을 수 없는 ‘욕동’에 기인하지 않던가. 그는 스스로 ‘주인공’이길 원하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곤, 아아, 나의 ‘진실임직함’은 ‘진실’에 다다르지 못했구나, 하고 자성하며 추론을 다시 하는가?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다고 조악하게 현실을 도피하지 않던가. 그가 ‘주인공’인 삶은 과연 현실(진실)을 추론하던 와중의 가설이었던가? 그럴 리 없다. 그가 도달한, 추론 아닌 상상에의 사다리는 ‘진실임직함’이 아니라 ‘진실이기를 원함’을 거치하고 있다. 일종의 소원 성취로서의 가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