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인간의 논리#

영화 ‘셔터 아일랜드’ 리뷰#

정의는 범주를 가진다. 예컨대 ‘괴물’과 ‘선량한 인간’을 비교할 때, ‘선량한’을 수식하는 ‘인간’이 너무 넓은 범주 아닌가. 이를테면 ‘선량한’ 행위는 임의적으로 성립하겠지만, ‘선량한’ 인간은 너무 넓은 범주라, 정의라기보다 감상적인 ‘호소’를 위한 표현에 가깝다. 이처럼 넓어서 애매한 표현은 대다수 혼란과 함께할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선량한 인간’이라는 것인가 하고. 그러니까, ‘선량한’ 인간이 도대체 어딨는지.

마찬가지로, 위대한 인간이 도대체 어딨는지. 위대한 작품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나? <위대한>이라는 형용사 자체가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자기애적 퇴행에 영원히 속박되어 있는 나약한 자의 승패에 고착된 위기의식만 보여줄 뿐이니. 어떤 의미에서건 그는 평생, 물론 그의 사후에도, 영원히 ‘위대할’ 순 없을 것이다.

위대한 인간,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그저 “유효한” 작품이 있을 뿐 아니겠나.

매 작품마다 그 유효성을 담지하기 위한 ‘노력’을 감안하기 싫어 ‘천재’라는 나약한 개념이 등장하기도 했을 텐데. 가령, 제아무리 숙련된 장인도 자기 자신의 새로운 ‘작품’, 그러니까 전작의 저 모든 <유효성>을 뛰어넘는 <유효성>을 위한 ‘작품’을 위해서는 ‘노력’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그 과정을 퉁 치고, 타자와의 비교로만 사고하는 퇴행적인 자기애적 방편으로서 ‘천재’라는 단어는 그토록 편리한 것이다.

이처럼, 그러니까 현재 그런 것과 같이 천재의 신화가 퇴행의 일종으로 사용된다면, 다분히 불멸의 위대한 존재가 되려는 바도 유사한 퇴행의 일종 아니겠나.

그러나, 그처럼 우리는 수많은 퇴행을 하겠으나 그 퇴행이 곧 우리 자신일 리는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누군가 퇴행 섞인 발언을 하더라도, 삶에서 바라보면 분명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심지어 그런 발언을 한 사람의 ‘작품’은 예의 퇴행과 얼만치나 상관이 있을지 살펴봐야 할 터다. 물론 어떤 삶은 퇴행에의 정당화를 위해 모조리 던져지기도 한다. ‘당연히’ 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명’도 ‘순교’도 될 수 없겠지만, 어쨌든 그건 좀 더 넓은 범주의 문제 아니겠나.

예컨대 그 자신의 평전에서 언급되기로, 비트겐슈타인이 스스로 “완전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가 완전한 인간을 가정하는 퇴행적인 시도에서 그의 삶을 시도하고 끝냈는지는 살펴봐야 할 별도의 문제인 것이다. 심지어는, 그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 내용의 유효성이 그걸로 퇴색되는지는 또한 더더욱 별도의 문제 아니던가.

덧셈을 발견한 누군가의 사생활이 덧셈을 이해하는데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저 덧셈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해한 척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덧셈’의 복잡성에 접근하기 힘든 그 자신의 지능적 문제를 다른 방편으로 띨띨하게 해결하고자, 우선 1) ‘덧셈’이라는 <법칙> 혹은 <이론>을 <주장>으로 끌어내리고는, 2) ‘덧셈’을 발견한 자의 사생활에서 일어난 사건을 ‘덧셈’ 그 자체로 번역해 버리는 퇴행적 증상을 얼마나 많은 관객, 그러니까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관객에게서 발견하곤 하던가 말이다.

그렇게 니체의 영원회귀는 어느 날, 고백했다가 차인 사람이 새로운 기회가 아쉬워서 만든 <주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지껄이는 것이다. ‘이해했다’고. 그리고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끄덕거리는, 그러니까 <메시지>와 <메신저>를 이런 방식으로 혼동하는 흉물스러운 양태가 어찌나 즐비하던지.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덧셈’이라는 <법칙>을 누군가의 <주장>으로 끌어내린 후, 그 누군가의 삶에서 시끄러운 사건 하나를 끄집어내선 감상하며 지껄이는 것이다. <주장>의 <저자>의 삶이, 그 <주장>의 <내용>을 이해하게 했다고. 그리고는 3 더하기 3은 6이라고 ‘암기’해서 지껄일지언정 그는 3 더하기 4가 뭔지는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3에 4를 더하면 7이라고 언급하는 순간, 그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는 것이다. ‘덧셈’을 주장한 사람의 삶이 이러저러하게 비도덕적인데 어떻게 덧셈에 동의해 그걸 주장할 수 있느냐고. 여기서의 문제는 이 연설자가 다만 3에 4를 더하면 7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데에만 있지는 않다. 심지어 그 무능의 문제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손쉬운 말꼬투리로 주제를 ‘도덕’이나 ‘감상’ 따위로 전환하는 정도에 그치지도 않는다. 여기서 문제는, 이 연설자는 여기 이 ‘덧셈’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심지어 그 문제의 영토는, 스스로 ‘이해했다’는 연극적 역할에 자신을 배당하였으므로, 이제 그 자신이 어쩌면 어느 날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를 ‘기회’를 스스로 ‘영원히’ 박탈해 버렸다는 데까지도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자가 자기 글의 연역 과정에 예의 ‘덧셈’을 끼워 넣는 순간, 예의 연설자는 저기 저 ‘비도덕적’인 ‘덧셈’을 인용한 데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는 것이다. 은연중에 ‘메시지’는 모조리 삭제되고 ‘메신저’만 남아 <네 편 내 편>의 영원한 고통 속에서 싸우는 것이다. “우리 아빠가 더 <위대해>!” 그러면서 논쟁이 촉발된다. 그런데 그 논쟁은 주제의 엄밀성을 다루는 게 아니라 인물의 위대성을 다루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데리다가 더 위대해! 응애!”, “아니야, 푸코가 더 위대해! 응애!”, “사실 난 플라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응애!” 등으로. 이제 내용은 사라지고, 저 내용을 대표하는 방식이 마치 일반의지를 국회의원이 대표하는 방식과 같이 바뀐다. 정책의 유효성은 인물의 성격이나 도덕성으로 대변되면서, <메시지>로서의 내용은 <메신저>로서의 인물로 탈바꿈되어 학위의 주제가 <내용> 아닌, 저 내용을 대표한다는 낡고 흉흉한 주장 아래 <인물>이 되어버리는 괴랄한 사태가 이어지는 것이다.

여기선 <로고스>만 쏘옥! 빠지고, <에토스>와 <파토스>만이 살아남는다. 물론,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면 <누가> 말했는지로 퉁 치는 얄팍한 양태는 때에 따라 유용하긴 하겠다.

그런 유용한 때가 오지 않기를.

누군가 정체성을 양자택일해야 한다고 해보자. 괴물로 살지, 선량한 인간으로 죽을지 고민하는 그에게 그런 고민의 선택지를 가르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평판 아니던가. 그가 정체성이라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괴물’이 아닌 ‘선량한 인간’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그가 혼자 정의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그러니까, 그는 자기 자신을 ‘괴물’이 아닌 ‘선량한 인간’으로 보아달라고 ‘평판’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는 ‘평판’이 이미지나 개념의 일종에 그친다고 생각하지 못할 수 있다. 그 이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 ‘평판’은 때에 따라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책상’이 넓은지 좁은지도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고 ‘책상’에 이입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는 ‘평판’에 이입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언제 ‘책상’에 이입하는가? 원하는 책상이 있을 때가 아닌가. 이 단순한 사례로 뒤집어 보면, ‘그’가 ‘평판’에 이입하는 건 원하는 ‘평판’이 있어서가 아니던가. 그는 지금 자기가 가진 ‘평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떼를 쓰는 상태인 것이다. 얼마나 떼를 쓰냐면, ‘원하는 평판’을 가진 상태로 정체성을 분리하곤 그렇지 않은 상태를 해리하기에 이를 수도 있는 정도인 것이다.

물론 그는 그 자신이 ‘책상’이 아니란 걸 안다. 그는 그 ‘책상’을 소유하거나 사용하지만 ‘책상’이 아니다. 그는 가끔 ‘책상’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먹기도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그는 ‘평판’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이 곧 ‘평판’이 아니란 사실을 모르는 모양으로 굴기도 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평판’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여기는 까닭인가? 도무지 ‘정체성’이니 ‘인간론’이니 ‘존재론’이니 포장하지만, 결국 ‘평판’이다. 그게 왜 그리 중요한가? 물론, 어떤 ‘평판’은 삶에서 엄청난 유효성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는 ‘평판’을 ‘연산’해야지 ‘이입’할 필욘 없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기호’를 통해 ‘사고’한다. 아주 간단한 ‘사고’조차도 기호가 없으면 전개가 힘이 들 것이다. ‘기호’는 단순히 매개되는 현상을 지칭하기도 한다. 배고플 때 나는 “꼬르륵” 소리가 기호가 되기도 하니까.

문장을 작성하는 일은 ‘기호’를 다루는 일이다. 그런데, 어떤 문장은 기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어떤 선언, 어떤 정의가 그러할진대. 수신자를 의도적으로 ‘기호’에 이입시켜 기호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퇴행’ 상태로 이끄는 것(호소 혹은 선동)이다. “슬픔”이라는 기호와 “슬픔”이라는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문제가 된다. 특정 기호에서 감정이 ‘꽉’ 막히고 사고가 멈추는 걸 ‘고착’이라고 하지 않나. 어떤 트라우마는 ‘기호’에 반응한다. 속된 말로 어디서 긁히는지 살피면 어디서 기호가 막혀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어느 정도는 긁힌다. 문제는 인생을 걸고 긁히는 데서 일어난다. 문제는 삶 전체를 걸고 ‘기호’에 ‘꽉’ 막혀버리는 데서 생긴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기호에서 감정을 빼지 못하면 기호를 전개할 수 없다. 전개할 수 없이 고착되면, 그리 동어반복이라는 ‘변비’ 속에서 곪으면 어떻게 되는가? 어떤 ‘평판’에 고착되고 그 평판을 주장하기 위해 ‘존재론’을 말하기 시작하는 ‘증상’에선 어떤 고름이 발견되나?

그러니까, 그가 괴물로 살지 선량한 인간으로 죽을지 고민할 적에, 그러다가 때로 ‘죽음’을 선택하기에 이를 수도 있지 않나. 비극은, 그가 애초에 괴물도 선량한 인간도 아닌 데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자아’가 얼마나 중요해질 수 있는지, 혹은 ‘자아’가 얼마나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지 따위가 아니라, 어째서 자꾸 ‘존재론’이나 ‘자아’ 따위를 다루어야 하는지 아니겠나. 어째서 ‘구강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지. 어째서 ‘그’는, ‘가령’ 자동차의 작동 원리가 아닌 ‘자아’에 매몰되어 있는지, 심지어 ‘자아’나 ‘인간’의 작동 원리조차도 아닌 ‘자아’에 대한 ‘평판’, 그러니까 ‘존재론’이라는 ‘구강기’에 그토록 영영 머물러있는지. 그의 비극이 어떠하든 간에. ‘구강기’의 ‘존재론’이 그토록 문제라면, 요는 저 문제 자체라기보다 왜 저 문제로 <되돌아>갔는지가 더 주요한 문제 아니던가.